김우경의 심미안 5.

같은의미 다른 표현

우리는 사람이 사람답지 못할 땐 “개 같다”, “개보다도 못한” 등등  개를 소재로 수많은 언어들을 창출해 내며 비유하고 폄하한다. 한때 십대 청소년들은 모든 대화에 “개”자를 붙이지 않고는 대화가 어려울정도로 유행과 비속어의 남발이 일상화가 된 적이 있었다. 
“개 좋다”, “개 웃기다”라는 말뿐만 아니라 지면에 차마 담지 못 할 정도의 통속적이거나 익살스런 대화체들은 생활 속에 아주 밀접하게 쓰이고 있다. 어린사람일수록, 남자일수록 더 많이 사용한다. 심지어는 “개 같은 내 인생”이라는 영화의 제목도 있을 정도이다.
개는 왜 이런 용도로 표현되어지는 것일까? 농담이라고 하기엔 좀 과격한 표현을 쓸 때에 주로 사용하는 “개”의 표현은 상황에 따라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사실 주위에 강아지들을 키우는 애견인들이 많은 것은 그 존재가 사람에게 주는 유익이 많아서이다. 강아지는 사람과 함께하는 동물 중 가장 뛰어난 교감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충(忠)” 자를 붙여가며 일컷는 동물은 극히 드물다. 그 중에 하나가 개(犬)이다. 하지만 하찮은 존재, 인간과 구별하며 차별성을 두는 존재가 또한 개다. 크기와 상관없이 “강아지”라고 표현할 때와 “개”라고 표현할 때가 너무나 상반된 느낌을 가지는 건 나 혼자 뿐일까? “개가 어쩜 저럴 수 있을까!”와 “개는 개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상황이 교차되며 나름의 상상을 해본다. 강아지를 키우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요즘을 보면 사람에게 기대할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강아지에게 있다는 것이다. 
초핵가족(1인~2인가족)이 늘어나고 아이들이 줄어들고 있는 세상이어서인지, 각박한 세상에서 위안을 받을 만한 대상으로서 강아지가 선호되어서인지 무엇이 되었든 강아지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 건 부인할 수 없다. 이전에는 마당이나 집안에서 집을 지키는 존재 또는 잔반처리대상으로서의 “개”로서 사육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이제는 그런 표현은 거의 안 쓸 뿐만 아니라 사람과 동등한 대우를 넘어서는 웃지 못 할 상황도 종종 목격한다. 이제는 아이가 없는 가정에는 자녀대신의 위치까지 올라섰다. 좋은 것을 먹이고 병원을 데리고 다니며 수시로 산책을 함께 하고 애견의 건강에 정성과 시간을 투자하며 매우 아끼는 존재로 “반려(伴侶)”라는 명칭까지 붙이기에 이르렀다. 대단한 신분상승이 아닌가! 물질적으로는 풍족해져가는 세상 속에 강아지를 좋아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이유가 뭘까? 2~3대에 걸쳐 함께 살며 복닥복닥 거리는 가정도, 여러 자녀들의  생동감 있는 온기가 적어서 그런 것일까? 정(情)에 목마른 현대사회가 가져다 준 문화현상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르게 표현하거나 말하는 것은 인지 능력을 가진 생명의 특질이다. 그래서인지 하나의 현상이나 사건을 보고도 사람들은 수많은 해석을 내어 놓는다. 같은 의미의 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대상의 반응 또한 제 각기이다. 같은 본질을 가지고도 개라고 말할 때와 강아지라고 말할 때의 어감 자체가 틀리 듯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하는가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어떤 존재를 어떻게 부르는가에 따라서도 상당한 의미가 전해지니 말이다.  우리는 모두 선택적 제노포비아(혐오,기피)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정죄할 수는 없다. 개인 또는 같은 성향을 가진 단체의 선택일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끌리는 것과 끌리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환경이든, 사람이든, 음식이든 간에... 우리는 다양성에 대하여 습득하고 배우는 것에 더욱 힘써야 한다. 

단, 양심과 선함에 근거한 기준을 가지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누구는 옳고 누구는 틀리다고 단정 지으며 색을 입히는 것은 옳지 않은 행동이다라는 것이다.  
자신을 드러내기 좋아하는 사람, 왜곡된 우월감을 가진 사람, 특정한 야욕을 가진 사람들은 나누기를 선호한다. 내편과 상대편 또는 우리 편으로 나누어야만 명확한 자신의 자리가 생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다수의 사람이 자신과 생각이 같다고 착각하고 엄청난 시대적 과오를 저지르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고 올바른 것이라 여기고 온 힘을 다하고 대의를 위해 자신이 희생한다고 한다. 푸틴처럼 말이다.       
  
대다수의 지자체는 정부의 핵심 키워드인 “균형발전”을 핵심키워드로 행정방향을 정하고 추진 중에 있다. 도시재생을 너머 균형발전을 이루겠다고 한다. 그런데 정말 균형적인 발전을 하고픈 마음들은 있을까? 도시재생이 쉬운 일도 아니고 짧은 시간에 이룰 수 없는 것도 해외 수많은 사례를 통해 보아왔다. 한 사람이 병들어도 가족 전체가 희생하고 돕고 간호해야 회복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하물며 셀 수 없는 사람들과 다양한 문화 환경이 즐비한 우리사회의 회복이 그리 쉬울까? 사심들을 내려놓고 오로지 필생의 각오로 협력해야 가능한 것이 상생인데 말이다. 상생은 모두가 사는 길이지만 소수의 끝없는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을 지난 과거에서 우리는 보았다. 그 희생 덕분에 다수가 기근도, 독립도, 전쟁도, 가난도 극복했다. 균형발전은 어떤 의미이고 어떤 표현인 것일까?  이것저것 엮어 놓고 만들어 놓은 다음 여기서 무얼 하라는 식의 인위적인 또는 행정 편의적인 사업과 계획이 남발되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또한 어떤 특정인의 실적과 정치적 행보를 위해 시행되고 기록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지속가능”과 “균형발전”은 매우 좋은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지만 어쩌면 이룰 수 없는 희망인지도 모르겠다. 지난날 새마을운동의 다함께 “잘 살아 보세”가 생각이 난다. 이전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옷깃을 다시 여미고 다시 나가자. 지금은 모든 분야가 위기의 때이고 준비해야 할 때이다. 우리의 미래와 후손들을 위해...